Connect
To Top

기름때 절은 코치 자켓과 너구리

준식이는 한 손으로 코헤이가 던지듯 의자에 걸쳐둔 코치 자켓을 가르치더니 다시 한 번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곤 푹 숙인 얼굴로 눈만 간신히 코헤이를 바라보며 수줍게 얘기했다. “유 자켓 기브 미”. 코헤이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 오케이. 오케이.”라 대답했다.

옆에 있던 현민이가 말도 안된다는 듯 “저걸 달라고?” 라고 얘기하자 준식이가 “킹스에서 준다고 했어~.”라며 자랑하듯 말 했다. 현민이의 입 모양은 정확히 ‘헐’을 나타내고 있었다. 코헤이가 입고 있던 너덜한 코치 자켓 이야기다. 어느 곳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검은색 코치 자켓이었다. 다른 것들과 차이가 있다면 등에는 STONP라는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고 흰색이었던 내피는 기름때에 절어 검은색에 가까워져 이미 꽤 낡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낡은 옷이라도 세계적인 스노우보더가 입고 있는, 그 팀의 로고가 새겨진 자켓은 스노우보드를 사랑하는 소년에겐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으리라.

준식이 역시 현재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스노우보드 회사인 버튼 소속의 선수이지만 그저 스노우보드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그 기름때 절은 낡은 코치 자켓이 너무 멋져 가지고만 싶었던 그 순수한 마음이 그를 더욱 성장시킬 원동력이 될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코헤이에게 겨우 수줍게 말을 건넸던 자신과 같은 팬을 만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나도 언젠가 그들의 유니폼이 지독히도 가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새빨간 색이 멋졌던 닛폰 오픈, 도쿄돔 엑스트레일(X-TRAIL)의 디거 자켓, 또 흔하지 않게 오렌지 색으로 등 뒤에는 커다랗게 A-X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던 일본 실내 스키장 아크로스 시게노부의 스태프복까지. 모두 다 기름때에 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헌 옷 상자에 버려도 시원찮을 수준의 옷들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가지고 싶은 옷이었다. 그 옷을 빌려 입고 찍었던 기념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얼굴이 조금 탈까 선크림을 빽빽히 바르는 것도 모자라 발라클라바로 무장을 하고 보드를 타지만 10여 년 전에는 달랐다. 비디오를 통해 접한 프로 스노우보더들은 모두 얼굴에 고글 자국이 남아 반은 흰색, 반은 검은색이었다. 우리는 그걸 ‘너구리’라 불렀는데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세계적인 프로 스노우보더들도 모두 너구리였고, 국내에서도 좀 탄다 싶은 보더들은 모두 너구리였다. 그 너구리 수준이 상대의 전투력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너구리가 되기 위해 선크림따위는 절대 바르지 않았다(아직까지 후회하고 있다만). 스노우보드를 모르는 친구들은 부끄럽지 않냐고 묻기도 했지만 전혀.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때는 스케이트보드도 열심히 탔다. 매일 저녁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미도파 백화점 앞에 모여 친구, 형, 동생들과 미친 듯이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각자 편의점, 독서실 알바로 번 푼돈을 모아 기물을 만들고 대리석 바닥에 내리꽂히면서도 즐거웠다. 밤새도록 스케이트보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침이 되면 다른 스팟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난 이제 ‘스케이트보드를 탔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부끄럽다. 여전히 그곳에 가면 열심히 타고 있는 친구들을 보기가 부끄럽다. 이런저런 핑계로 예전처럼 타고 있지 못하는 내가 나는 너무 부끄럽다.

이 신(Scene)을 모르는 이가 보기엔 그저 넝마와 같은 옷과 피부병 같아 보일지도 모르는 피부색 차이가 멋져 보였던 것은, 성인이 되어서 단지 스케이트보드, 스노우보드, 서핑을 할 시간이 모자라 예전처럼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고 예전만큼 잘 탈 수 없음이 단지 아쉬움이 아닌 부끄러운 감정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신에 대한 지독한 존중과 경외감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까지 모두 염두해두고 했던 행동들은 아니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한 존중 없이는 나 자신도 타인으로부터 존중 받을 수 없다. 복잡한 계산 없이 순수한 열정을 분출하는동안 얻은 누더기 같은 자켓, 구멍 뚫린 스케이트 슈즈, 슈트를 입었던 부분만 남기고 타 버린 피부에 긍지를 가지고, 또 그것을 멋있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prf
이원택
리얼매거진 발행인 / 편집장

● THE ReeAL MAGAZINE VOL.08 RESPECT

More in SCRIBBLE

  • 육아와 라이딩의 기로에 서다

    아내에게 용서를 구한 뒤 가족의 눈치를 살피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날, 오랜만에 느끼는 근육의 뻐근함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THEReeALMAG2017년 5월 25일
  • HOME

    나는 이제 선수로서 참여할 수는 없지만 후배들의 조력자로서 세계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스노우보드 종목에 관련 된 일을 한다. 선수로서 풀어내지...

    THEReeALMAG2017년 2월 1일
  • 극우

    다른 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니라고들 말하지만, 틀린 것은 틀린 거다.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내 측근의 일이라면 덮어두고 옹호하려 든다면, 그곳으로부터...

    THEReeALMAG2017년 2월 15일
  • Surfing Kills

    서핑을 만난 이후로 일찍 일어나는 일이 두렵지 않게 됐고, 구두쇠였던 나에게 비싼 서핑 장비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들이 되어 본의...

    THEReeALMAG2016년 8월 5일
  • 회기

    스스로에게 떳떳한 선택을 해 본 적 없던 무책임한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자 엄청난 책임감이 부여되는 큰 선택이었다. 그렇게 큰 꿈과 계획이...

    THEReeALMAG2015년 11월 10일
  •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있을 너에게

    오늘은 015B의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을 너에게>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나의 음악을 들으러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옳은 선택 을 할...

    THEReeALMAG2015년 11월 10일
  • 짬짜면

    때로는 일반적이지 못한 행색으로 오해나 비합리적인 대우를 받을 때도 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선택 후에 따라오는 선택의 대가이며, 선택이란 건 애당초...

    THEReeALMAG2015년 11월 10일
  • Escape plan

    일상 생활이든 스노우보딩이든 안전 제일주의로 현재의 삶을 유지할 것인지 한계를 깨고 다음 레벨로 나설 것인지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같다....

    THEReeALMAG2015년 11월 5일
  • Oldies but goodies

    시간이 더해져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새로운 것과는 취향이 맞지 않아 이전의 것을 더 좋아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

    THEReeALMAG2015년 11월 5일